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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은 위대한 영웅인가?

℗℥℔©№ℊ 2022. 3. 28.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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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사전에 불가능이란 없다 나폴레옹이 알프스를 넘으며 한 말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유럽을 호령하던 나폴레옹이 유럽뿐만 아니라 이집트 지역까지 원정을 떠났었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나요? 오늘은 1798년 시작된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합니다 그런데 나폴레옹은 왜? 많은 지역 중 하필이면 이집트로 원정을 떠나 쓸까요

이집트 원정

이집트로 떠나기 전 나폴레옹은 이미 이탈리아 원정을 성공적으로 마치면서 프랑스 국민들로부터 많은 인기를 얻고 있던 유망한 장군이었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개인적으로 이렇게 승리를 통해 얻은 인기가 곧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갖고 있었는데요 그렇기에 인기를 유지하기 위해서 더 많은 공을 세워야 한다고 생각했고 기왕이면 이집트 지역을 점령한 뒤 성공적으로 이 지역에 대한 통치까지 마쳐 군인뿐만 아니라 정치가로서 도 유능한 모습을 보이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아직 프랑스의 지배자가 아니라 한 명의 장군의 불과
했기에 이집트로 원정을 떠나기 위해서는 정부의 승인이 필요했습니다 당시 프랑스는 로베스피에르 가 몰락한 이후 보수적인 세력 으로 구성된 총재 정부에 의해서 운영되었는데요 시민들에게 인기가 없던 총재 정부는 당시 막 이탈리아 원정을 마치고 돌아온 젊은 장군 나폴레옹에 대한 강한 경계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총재 정부의 입장에서 봤을 때 이집트 원정 은 시민들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던 나폴레옹을 일시적으로 나마 정치의 중심지인 파리에서 떨어뜨려 놓을 좋은 기회였습니다 따라서 총재 정부는 나폴레옹의 계획을 승인해주게 됩니다
그러나 이집트 원정이 사사로운 이해관계 에 의해서만 결정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프랑스의 국가적 차원에서도 이집트 지역은 중요한 의미를 지녔는데요 당시 프랑스의 숙적인 영국의 핵심 식민지 바로 인도였죠 프랑스가 이집트 지역을 장악하면 인도에 대한 영국의 지배력을 견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은 나폴레옹의 개인적 야망 젊은 나폴레옹을 견제하려는 노쇠한 정치인들의 목표 그리고 프랑스의 국가적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이집트원정의 실패?

2개월간의 준비를 거친 후 나폴레옹은 1798년 5월 19일에 툴롱 에서 4만여 명의 해군과 만여 명 의 선원을 이끌고 원정을 시작합니다
영국 해군 특히 넬슨 에게 계획이 들통나지 않기 위해 출발 때까지도 나폴레옹을 제외한 극소수의 인원만 이 목적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원정에는 다른 일반적인 원정과는 다른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었는데요 그것은 나폴레옹이 원정단에 군인뿐만 아니라 167명의 학자들을 동행시켰다는 점입니다 여기에는 수학자 공학자와 더불어 미술 학자와 문헌학자를 비롯하여 다양한 방면에 학자들이 포함되어 있었죠 이들은 이집트를 정복한 이후에 성공적인 통치를 덮고 고대 이집트 문명을 이른바 재발견하는 목표를 갖고 나폴레옹의 군대의 통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영국 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로제타스톤 역시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 때 발견된 유물입니다
그러니까 나폴레옹이 이집트 원정 은 군사적 전략적 목표뿐만 아니라 문화적 목표 또한 가지고 있었던 셈입니다 한편 당시 이집트는 공식적으로는 오스만 제국의 통치하에 있었는데요 실질적으로 는 17세기 중반부터 이 지역에 대한 오스만 제국의 지배력이 약화되어 토착 세력들에 의한 권력 투쟁이 이루어지고 있는 혼란스러운 상황이었습니다 그렇기에 나폴레옹의 군대에 맞서 효과적으로 저항을 할 수 없었죠 나폴레옹이 상륙하자마자 7월 2일에 알렉산드리아가 점령되고 되고 7월 21일에는 이른바 피라미드 전투에서 5000여 명의 이집트 군이 궤멸적인 패배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 전투 이름의 유래는 다음과 같은데요 적군을 맞이한 나폴레옹이 자신의 군대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피라미드 옆에서 전투가 벌어져서 피라미드 전투라는 이름이 붙은 것입니다 멋있지 않나요 그러나 사실 전투가 벌어진 위치에서 피라미드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모든 것은 나폴레옹 본인이 후대에 스스로 지어낸 영웅담이었습니다

 

이집트원정의 실패 후 나폴레옹의 행보

어쨌든 피라미드 전투의 결과로 나폴레옹은 이집트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게 됩니다
그러나 곧 한 가지 결정적인 사건이 벌어지게 되니 그것은 바로 8월 2일에 프랑스 군을 이집트까지 수송해 온 해군이 영국의 넬슨 제독의 의해서 전면에 가까운 피해를 받은 것입니다 이는 프랑스 본국으로부터 의 추가 보급이 불가능해졌음을 의미했죠 설상가상으로 이 소식을 들은 이집트인들이 나폴레옹에 대한 봉기를 시도합니다 나폴레옹은 2000명이 넘는 이집트인을 죽이고 봉기를 진압하는 데 성공하지만 넬슨 제독과 의 전투 이후로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의 운명은 사실상 실패로 결정되었다고 봐도 무리는 아닙니다 물론 나폴레옹은 1년 가까이 이 지역에 머물면서 계속 원정을 이어 나갑니다 알 아리쉬 가자 헤브론 나파 그리고 타보로 산과 같은 역사적 장소에서 수 차례 전투를 치르고 이집트를 넘어 지금의 시리아 지역까지 진출하는데요 이중에서도 야파에서 의 전투가 당시 인구에 회자되었습니다
이곳에서 나폴레옹은 자신에게 반복적으로 저항한 1500명의 포로를 처형하는데 화약을 아낀다는 명분으로 총을 쓰지 않고 총검을 쓰거나 포로를 익사시킵니다 그러나 당시 특히 많이 퍼진 이야기는 프랑스 군 내에서 퍼진 페스트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군내에 전염병이 돌고 사기가 떨어지자 나풀 내용이 직접 환자들을 방문해 손으로 어루만져 주면서 낫기를 기원해 주었다는 이야기였죠 이는 한편으로는 군의 사기를 진작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나폴레옹이 장군으로서 뿐만 아니라 통치자로서 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서양 중세에서는 대대로 왕이 환자의 몸을 만져 주면 해당 부위가 치료된다는 이른바 기적을 행하는 왕에 대한 신화가 존재했었거든요
나폴레옹은 전염의 위험 때문에 자신을 만류하는 부하들을 무시하고 환자들을 돌봐주고 나오면서 부하들에게 거봐라 아무 일도 없지 않으냐라고 패기 곱게 말했다 고 전해 졌습니다
사실 나폴레옹은 사실 환자들을 만지기 는커녕 방문하는 것조차 매우 꺼렸다 고 합니다 이렇게 각종 전투 들에서 소소하게 승리를 거두기는 했지만 원정 자체가 고착화되고 지지부진해 지자 나폴레옹은 쓸쓸히 이집트 원정 이후의 미래를 생각하게 됩니다 애초에 이집트는 나폴레옹에게 있어서 공을 세우기 위한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않았는데 넬슨 제독에게 해군이 괴멸하면서 본국 으로부터의 지원도 끊기는 상황에서 더 이상 이룰 수 있는 것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죠 또한 유럽에서는 영국과 오스트리아 그리고 러시아가 연합을 구성해서 프랑스의 맞서 전쟁을 벌일 준비를 하고 있었죠 결국 나폴레옹은 프랑스 정부의 명령이 내려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판단으로 프랑스로 돌아가기로 결심하고 1799년 8월 23일에 이집트를 떠납니다 나폴레옹은 부하들에게 나일강 지역을 탐사한다는 핑계를 대고 자신이 데려왔던 몇몇 학자들 그리고 심복들과 함께 자신의 진영을 벗어나 곧바로 프랑스로 돌아갑니다 즉 자신이 그동안 함께 원정을 벌였던 군대에게는 자신이 프랑스로 돌아간다는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은 것이죠 나폴레옹은 떠난 이후에야 편지로 이 소식을 부하들에게 알립니다 이 소식을 들은 부하들은 당연하게도 매우 분노했다고 전해집니다 나폴레옹은 영국 함대에 눈을 피해 조심스럽게 프랑스로 향해해야 했는데요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10월 8일 프랑스의 항구인 프레쥐스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프랑스 본국에 도착한 나폴레옹은 곧바로 파리로 향합니다

 

그는 파리의 입성하면서 자신의 원정이 실패로 끝났다는 사실을 철저하게 숨기고 시민들 앞에서 마치 개선장군 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당시까지만 해도 먼 지역 간의 정보 전달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못했는데 가뜩이나 지중해가 영국 함대에게 장악 당 하면서 소식이 더 늦게 퍼진 것을 철저하게 이용한 셈이죠 사실 나폴레옹의 프랑스 귀국은 정부의 명령에 따른 것이 아닌 본인의 자의적 판단에 의한 것이었기 때문에 엄밀하게 따진다면 나풀 레옹은 군법으로 처벌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당시 총재 정부는 시민들로부터 전혀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었기에 전폭적인 인기를 누리던 나폴레옹을 처벌하고 자 시도하는 것은 굉장한 모험이었죠 결국 총재 정부는 나폴레옹을 처벌하지 못한 채 어물쩍 넘어가게 되고 나폴레옹은 한 달이 지난 11월 9일 쿠데타를 일으켜 총재 정부를 뒤엎고 스스로 10년 임기에 집정관이 됩니다 당시 프랑스는 혁명 이후 새로 도입한 달력을 쓰고 있었는데 이 신 달력에 의하면 나폴레옹이 쿠데타를 일으킨 날짜가 브뤼메르 달에 18일이었기에 이 쿠데타를 이후로 브뤼메르 18일 쿠데타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집트의 버려진 프랑스 군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나폴레옹은 이집트를 버리고 떠나면서 지휘권을 자신의 부하였던 장 바티스트 플랩 에르라는 장군에게 넘겼는데 요
그는 힘겨운 상황에서 나름대로 사태를 수습하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토착 지역의 저항 세력에게 암살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남은 군대도 알렉산드리아에서 벌어진 영국군과의 전투에서 패배하게 되죠 이 전투의 결과로 남은 프랑스 분은 영국에게 행복하게 되는데 항복하면 서 그동안 이 지역에서 수집한 문화재들까지 모두 넘겨주게 됩니다 로제타 스톤을 나폴레옹의 원정대가 발견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로제타스톤을 보기 위해서는 루브르 박물관이 아니라 영국 박물관에 가야 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이로써 만 오천 명이 넘는 군인들이 전투로 상황하고 비슷한 수가 원정 도중 얻은 질병으로 사망한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은 완전한 실패로 끝나게 됩니다 이렇게 지금까지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나폴레옹의 개인적 야망과 더불어 복잡한 국내외적 상황에 의해 시작된 이집트 원정은 실패로 끝났습니다 그러나 정작 나폴레옹 개인은 원정 직후 쿠데타를 일으켜 자신의 정치적 경력에 있어서 에 정점을 향해 나아가게 됩니다 지금까지 나폴레옹을 위대한 영웅으로 만 생각하신 분들이 계셨다면 한번쯤 나폴레옹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계기가 되지는 않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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