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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편전쟁으로 인한 중국의 몰락

by ℗℥℔©№ℊ 2022. 3.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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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아편 전쟁이 끝난 후 영국은 승전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의 결과에 불만족스러운 했는데요 난징조약을 통해서 다양한 이권을 보장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것을 얻어 낼 수 있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영국은 시간이 지나면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1856년 10월 영국에게 이 기회가 찾아옵니다

 

영국의 공격

당시 청나라 관리들은 광저후항에서 해적선으로 의심 봤던 한 선박을 발견합니다 애로호라는 이름으로 등록되어 있던 이 선박은 공식적으로는 영국인의 소유였는데요 그럼 배안에 타고 있던 선원들은 모두 중국인이 얻고 정황상으로 봤을 때 이들은 해적임이 분명히 에 청나라 관리들은 이들을 체포했습니다 그런데 영국은 바로 이 사건을 선전포고를 위한 좋은 명분으로 삼게 됩니다 방금 말씀드린 것처럼 에로 호라는 이름을 가진 이 배는 공식적으로는 영국인의 소유였기에 배에는 영국 국기가 걸려 있었습니다 영국은 촉나라 관리들이 선원들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배에 걸린 영국 국기를 훼손했다며 문제 삼았고 이윽고 이를 구실로 항구를 공격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2차 아편 전쟁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2차 아편전쟁 이는 1차 아편전쟁 때와는 다른 점이 있었는데요 그것은 바로 프랑스가 영국에 편에 서서 참전했다 는 점이었습니다 에로 호사 건 있기 전 8개월쯤 전, 오귀스트 샤프드렌느라는 평 쓰 의한 소자가 당시로는 청나라의 허가가 필요한 내륙 지역에서 허가 없이 선교 활동을 하다가 처형됐습니다 프랑스는 바로 이 사건을 명분 삼아 영국의 편에 서서 청나라의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의 진정한 의도 역시 영국과 마찬가지로 중국으로부터 더 많은 이권을 빼앗아 내기 위함이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겠죠 전쟁이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영국과 프랑스는 홍콩을 거점 삼아 광저후항을 공격하고 함락하는 데 성공합니다 당시 이 도시에는 100만이 넘는 인구가 살고 있었는데요 이런 대도시 항구를 함락하기 위해 영국과 프랑스군은 단 열다섯 명만 이사 망했습니다

 

텐진 조약의 체결

광저우가 함락된 후 위기감을 느낀 청나라 정부는 1차 패 전쟁 때와 마찬가지로 강화 협상에 나서게 됩니다 이 협상에서는 1차 앞에 좀 된 때와는 다르게 전쟁 당사자인 영국과 프랑스뿐만 아니라 러시아와 미국까지 참여하는데요 그 결과 1858 년 6월에 텐진 조약이 합의됩니다 여기에는 영국 프랑스 러시아 그리고 미국이 베이징의 공사관을 설치하여 외교관이 상주한다는 것 10개 항구가 추가로 계양된다는 것 외국 선박들이 양쯔강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는 것 중국 내륙의 외국인들이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중국이 영국과 프랑스의 각각 400만 달러와 2백만 달러에 은을 지불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전쟁 당사자들이 조약의 합의한 후 조약의 내용에 따라 베이징이 파견될 열강들의 외교관들은 군대와 함께 베이징으로 이동하게 되었는데요 이때 영국과 프랑스 군은 2200명의 병력과 21척의 선박으로 외교관들을 보고 있는데 청나라 정부는 베이징의 외교관이 들어오는 것은 조약의 내용에 따라 허용하되 군대는 수도에 들어올 수 없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영국과 프랑스 군은 이를 무시하고 대고 항에 상륙했는데요 이에 청나라 군은 영국과 프랑스 군을 포격했고 전쟁은 다시 이어졌습니다 영국과 프랑스 군은 이 사건을 구실 삼아 병력을 증가했고 이에 수도인 베이징 이 점령될 위기에 처하자 청나라 황제였던 함풍제는 열하로 피신했습니다. 결국 청나라 군대를 완전히 무너뜨린 영국과 프랑스 군은 총알 160년 10월 6일 베이징의 입성합니다 베이징의 입상한 이들은 궁전인 이 화원과 원명원을 약탈했습니다 영국 일각에서는 상징적인 의미로써 자금성을 아예 파괴 하자는 의견까지 개진되었으나 중재에 나선 러시아가 이를 완료하여 실현되지는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청나라 황제였던 함풍제에게는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결국 1860년 10월 18일 기존의 텐징 약보다 더 가혹한 조건을 담고 있는 베이징 조약의 체결되었습니다 베이징 조약 에는 기존의 항구에 텐징 까지 개항하는 것이 포함됐을 뿐만 아니라 홍콩의 인접한 구룡반도의 일부를 영국의 활용하는 것 중국에서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는 것 청나라가 영국과 프랑스의 각각 800만 달러에 은을 지불하는 것 그리고 아편 무역을 합법화하는 것 등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두 차례에 걸쳐 앞에 논쟁에 대해서 알아보았는데요 아편 전쟁 은 단순히 중국과 영국 그리고 펜스 사이에서만 벌어졌던 사건이 아니라 세계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사건이었습니다

 

중국의 추락과 그리고 조선과 일본

중국은 이제 세계에서 더 이상 대국이 아니 며 서구 열강들은 자신들이 더 이상 중국을 겁낼 필요가 없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당사자였던 중국 역시  이 사실을 깨닫고 서양의 기술을 받아들이는 양무운동에 들어가게 됩니다 즉 아편 전쟁 은 세계 패권이 누구에게 있는지 가 분명하게 드러난 전쟁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급변하는 세계정세에 대해서 누구보다 촉각을 곤두세우는 나라가 있었으니 이는 바로 일본이었습니다 일본은 이미 1차 앞엔 전쟁 때부터 네덜란드를 통해 전쟁의 진행과 결과에 대해 매우 정확하 고객 관적인 정보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1853년 미국의 페리 제독이 해군을 이끌고 일본에 도착하여 개항을 요구했을 때 전쟁이 아니라 개항을 선택한 것에는 기본적으로 당시 세계정세에 대한 이해가 깔려 있었던 것입니다 한편 일본과는 달리 아편전쟁의 의미를 제대로 깨닫지 못한 불운한 나라가 있었으니 이는 바로 조선이었습니다 1차 아편전쟁 때부터 국제 정세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던 일본과 달리 조선은 2차 아편 전쟁이 끝난 후에도 그렇지 못했는데요 이는 무엇보다도 세계정세와 관련된 정보의 습득에 있어서 지나칠 만큼 청나라의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조선의 왕이 어떤 철종의 실록에 실려있는 1861년에 기사 두 개가 이를 잘 보여줍니다. 두 기사를 살펴보면 청나라 황제가 피난을 갈 만큼 사태가 심각했음을 인식하고 있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이를 애써 청나라 입장에서 큰일이 아니라는 식으로 이해하려고 한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급변하는 세계정세를 인식하지 못하고 청나라의 게 더욱더 사대를 함으로써 이해를 갖춰야 한다는 의식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스스로 뿌듯해하는 모습까지 살펴볼 수 있는데요 당시 일본의 태도와 비교해 본다면 이러한 조선의 태도는 어쩌면 이후 펼쳐질 불행한 역사의 불길한 서막이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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