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이 곧 국가다 라는 말은 우리에게 의 14세가 한 것으로 잘 알려진 말입니다 이는 우리에게 절대군주 그리고 흔히 태양왕으로 불리는 루이 14세의 위엄을 잘 보여줍니다 그런데 사실 루이 14세가 실제로 이 말을 한 적은 없습니다 루이 14세가 이 말을 했다는 이야기는 그의 통치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그의 사후 후대인 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루이 13세의 죽음
그러나 사실 루이 14세가 처음부터 이렇게 강력한 왕권을 가졌던 것은 아닙니다
실상 오히려 그 반대 가까운데요 오늘은 무려 72년간 재위했던 루이 14세가 어떻게 태양으로 불릴 정도로 강력한 왕권을 키워나가는지 알아보고자 합니다 루이 14세는 1638년 루이 13세와 그의 부인이었던 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루이 13세가 태어나기 전까지 안 루이 13세 와 의 23년간의 결혼생활도 중 4번의 유산을 겪었을 정도로 루이 14세는 힘들게 얻은 아들이었는데요
이 때문에 안 어린 루이 14세를 매우 아꼈고 루이 14세 역시 어린 시절 어머니의 절대적인 영향력 아래서 성장했습니다 동시대에 증언에 따르면 안과 어린 루이 14세는 거의 하루 종일 같이 있었다고도 전해지는데 이는 당시 궁정 사회에서는 일반적이지 않은 경우였죠
이런 애착 관계는 루이 14세가 네 살밖에 안 되었을 때 루이 13세가 사망하면서 더 강해집니다 루이 13세가 사망하게 되자 왕위는 자연스럽게 루이 14세가 이어받게 되지만 당시 루이 14세의 나이가 너무나 어렸기 때문에 실질적인 통치는 어머니인 안이 섭정의 형식으로 하게 되는데요 열렬한 왕권신수설에 신봉 자였는 안은 어린 루이 14세에 일을 끊임없이 교육하는 한편 미래의 루이 14세가 정식으로 친정을 시작했을 때 걸림돌이 없도록 왕권을 안정화시켜 오는 것을 정책의 최우선 과제로 놓게 됩니다
나라 안에서의 반란
이를 위해서 안은 추기경이었던 쥘 마자랭을 재상으로 임명하고 마자랭에 반대하는 귀족들을 추방시키기도 했습니다 당시 유럽은 30년 전쟁의 끝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었는데 안과 마자랭은 이 전쟁을 마무리하는 베스트팔렌 조약을 프랑스의 이익을 최대한 보호하면서 성공적으로 체결하게 되죠 이 조약의 결과 합스부르크 왕가는 알자스 지역에서의 모든 영토를 프랑스의 할양했던 것입니다
아직 어린 루이 14세를 대신해서 속정을 하던 안에 통치는 무난하게 진행되는가 싶었는데요 그러나 프랑스 귀족들이 안과 마자랭 그리고 어린 루이 14세에 게 전면으로 대응하면서 위기가 시작됩니다 당시 프랑스 왕가는 유럽 대륙의 30년 전쟁에 개입하면서 재정적으로 적자를
보게 되었고 전쟁이 끝나자 그동안의 적자를 보전하고자 새로운 세금을 도입하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안과 마자랭은 일반 백성들 뿐만 아니라 귀족들에게 까지 새로운 세금을 물리려고 했던 것입니다 바로 이에 프랑스 특히 파리의 귀족들이 전면적으로 반기를 든 것인데요
1648년부터 53년까지 이어진 반란은 결과적으로 진압되긴 했지만 어린 루이 14세는 자신이 살고 있는 파리에서 벌어진 반란과 그 진압
과정을 지켜보며 파리 씨와 프랑스 귀족들의 대한 혐오감을 키우게 되죠 루이 14세가 이후 베르사유 궁전을 짓고 파리가 아닌 베르사유에서
통치를 하는 데는 이 당시 경험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됩니다 한편 안의 섭정을 도왔던 마자랭은 1661년 사망하게 되는데요
이제 스무 살이 넘은 루이 14세는 본격적으로 친정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는 곧바로 자신의 비서 들과 대신들을 모아놓고 지금까지는 마자랭
재상이 정부의 일을 처리했지만 이제는 내가 직접 통치할 것이다 이제부터 여러분은 나의 명령 없이는 그 어떠한 문서 심지어 여권 1장 조차 서명을 해서는 안 될 것이다라고 밝혔습니다 이는 맞아 등이 후임 세상을 임명하지 않고 각 부의 장관들에게 자신이 직접 명령을 내려 통치를 하겠다는 야심 찬 포부였죠 이 무렵 루이 14세의 입장에서 가장 큰 과제는 잇따른 존재 내전의 여파로 극심한 적자에 시달리던 왕가의 재정상태를 회복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루이 14세의 통치
이를 위해서 그는 장 바티스트 콜베를 재무부 장관으로 임명한데요 콜 베르는 우선 조세제도를 뜯어고치게 됩니다
당시 프랑스는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자면 극히 비효율적인 세금을 걷는 방식을 택하고 있었습니다 지방에서 관리가 세금을 걷으면 이 세금이 곧바로 프랑스 왕가 나 정부로 가는 것이 아니라 중간에 무수히 많은 유통 단계를 접했던 것입니다 이는 오늘날과 같은 중앙집권적 국민 국가 체제가 아니라 중세 봉건제 영향이 강하게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요 게다가 세금을 걷는 관료를 임명할 권한을 가진 자들은 돈을 받고 그 관직을 파는 대신 세금의 일정 비율을 그 관직을 산 자가 가질 수 있게 했기 때문에 당시 프랑스는 처음 거진 세금의 금액보다 최종적으로 왕가의 수중에 들어오는 금액이 터무니없이 저쪽 콜 베른은 프랑스 내부적으로 이런 불합리한 조세 제도를 부분적으로 뜯어고치는 한편 외부적으로는 중상주의 바탕에 프랑스 산업을 키워 나갑니다 중상주의는 국제 무역을 제로썸의 관점으로 파악해서 한나라가 수입보다
수출을 많이 하게 되면 다른 나라는 필연적으로 수입을 더 많이 하게 되고 이것이 곧 국력의 차이로 이어진다 고 믿은 이론입니다
그러니까 당대 유럽을 휩쓴 이 이론에 따르면 자국의 수출량을 늘리는 것이 곧 강대국으로 가는 길이 었던 것이죠 조 콜 베리는 그러한 세계관에 바탕에서 자국의 수공업자들을 지원하고 이탈리아 스웨덴 그리고 네덜란드 등지에서 기술력이 있는 수공업자 들을 스카우트해 옵니다
한편 루이 14세는 콜 베르의 지휘 아래 강화된 경제력을 바탕으로 자신이 지긋지긋해하던 파리를 벗어나 베르사유 궁전을 짓습니다
그러나 베르사유 궁전은 단순히 파리를 싫어하던 루이 14세에 개인적인 동기로 만 지어진 것은 아닙니다
그보다는 루이 14세에 치밀한 정치적 계산이 들어왔는데요 루이 14세는 베르사유 궁전의 프랑스 전국에 귀족들을 초대해서 그곳에 머물게 했던 것입니다 이는 여러모로 루이 14세에 게 정치적 이익을 가져다주었는데요 우선 각 지역의 귀족들의 입장에서 살펴보자면 자신을 제외한 다른 귀족들이 전부 왕의 초대를 받고 베르사유 궁전으로 가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홀로 왕의 초대를 거부하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일단 베르사유 궁전의 들어가서 살게 되면 왕인 루이 14세를 필두로 각 지역의 내로라하는 귀족들이 모여 살기 때문에 그들의 화려한
생활 자체에서 어마어마한 지출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궁정 사회에서 다른 귀족들의 사치스러운 수준의 발맞추지 않고 혼자 검소한 생활을 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웬만한 귀족들에게 베르사유의 생활은 경제적으로 무리를 가져다주었고 이 사실을 루이 14세는 누구보다 잘 알고 그것을 이용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콜베르의 정책으로 풍부해진 왕과 재정을 바탕으로 그는 귀족들에게 고가의 선물과 경제적 지원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귀족에게 전부 이렇게 했던 것은 아니었고 베르사유 궁전에서 생활하면서 자신의 행사에 모습을 잘 나타내는 귀족들에게 만 그렇게 했던 것이죠 이렇게 함으로써 루이 14세는 한편으로는 귀족들을 자신들의 본거지인 지방에서 떨어뜨려 놓고 다른 한편에서는 궁전 안에서 자신에 대한 의존도를 높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 이전까지 봉건제 영향으로 지방에서 강한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던 귀족들을 억누르고 태양왕이라고 불릴 정도로 절대적인 힘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루이 14세는 내부적으로는 귀족들을 자신의 통제 아래 무력화시키는 한편 외부적으로는 강대국으로서 프랑스의 지위를 과시하고자 끊임없이 전쟁을 벌였습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치른 전쟁 만해도 스페인과의 사이에서 벌어진 상속전쟁 네덜란드와의 전쟁 아우크스부르크 동맹 전쟁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등이 있었습니다 이런 끊임없는 전쟁은 유럽 대륙에서 강대국으로서 프랑스의 위치에 대한 자신감의 바탕을 보셨는데요 그러나 잦은 전쟁은 당연하게도 장기적으로 프랑스에 게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다줍니다 개별 전쟁의 결과를 떠나서 결과적으로 프랑스의 재정과 국력에 부담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잦은 전쟁이 여파는 결국 이후 프랑스혁명이 발발한데도 직 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말년에 루이 14세는 스스로 이러한 잦은 전쟁이 자신의 과오였음을 누구보다 의식했던 것으로 보이는데요 1715년 그러니까 76세의 나이로 사망하기 직전에 자신의 왕위를 이을 증손자인 루이 15세 를 불러 나는 전쟁을 너무나 좋아했다 그러나 그것은 백성들의 파멸에 바탕한 것이었다라고 말하며 자신의 과오를
되풀이하지 말라고 조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납니다 지금까지 루이 14세가 어떻게 왕권을 강화해 나갔는지 알아보았습니다
다섯 살도 채 안 되었을 때 어머니의 섭정 아래 즉위한 루이 14세의 왕권은 초기에는 절대 군주는커녕 귀족들의 반발에 부딪쳐 위기에 빠지기도 했었죠 그러니까 태양왕 절대 군주라는 수식어는 루이 14세가 5살 이후 평생 왕위에 제의하면서 스스로 만들어 나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 영상 처음 부분에서 루이 14세는 스스로 짐이 곧 국가다 를 말을 한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말씀드렸는데요 그가 죽기 전 침상에서 실제로 남긴 말은 오히려 정반대의 가까웠습니다. 짐은 이제 떠나지만 국가는 영원히 남을 것이다 라는 말입니다 이 말을 보면 자신이 70여 년간 만들어 나간 프랑스 국가에 대한 노군주의 소외가 느껴지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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