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은 18세기 중반을 지나며 몇 가지 기술에 있어서 혁명적인 발전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중 첫 번째는 바로 면 직물 분야에 있어서 의 발 전이었습니다 1733년 존 k 가 발명한 나는 북 1764년 제임스 하브레 가스가 발명한 제니 공저 끼 그리고 1769년 리처드 아크라이트에 의해서 발명된 수력 방 적기 등 일련의 기술 발전 과정에 힘입어 그간에 수작업으로 돌아가던 면직물 공업은 자동화되기 시작했고 폭발적인 생산력 증가를 감당하기 위해서 영국 내로 수입되는 면화의 양 또한 폭발적으로 증가했습니다
영국의 면화생산량의 변화
1750년 영국은 250만 파운드 면화를 수입했는데 1800년에는 5200만 파운드 변화를 수입했죠 수입된 면화는 영국 내 공장으로 옮겨져 가공되었고 이렇게 공장에서 생산된 완성품의 양은 영국 내에서만 소비될 수 없을 정도로 많았습니다 따라서 영국은 전 세계로 자신들의 생산품을 수출 하기 시작했는데 영국이 세계 경제를 이끌었던 시기가 바로 이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국의 산업혁명을 이끌었던 두 번째 기술 발전은 바로 증기력이었습니다.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와트는 10여 년간의 실험을 거친 끝에 1770년 대 증기기관을 완성했습니다
와트 이전에 18세기 초반에 도 증기기관의 초보적 형태가 발명 되긴 했지만 와트의 증기 기관은 기술 개량을 통해서 이전에 증기기관의 비해서 같은 양의 에너지를 생산하는 데 있어서 5분의 1에서 10분의 1에 불과한 연료를 사용했습니다 제임스 와트의 증기 기관은 발명된 후 곧바로 광산에서 의 작업에 주로 사용되었지만 발명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곧 기차와 배 동력 기관으로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이외에도 17세기 중반에서 18세기 초반을 거치며 제철 시멘트 유리등의 분야에 있어서 혁신적인 기술 발전이 일어납니다
산업혁명의 시작
이렇게 17세기부터 18세기 그러니까 한 세기에 걸쳐 일어난 장기적인 발전 과정이었기 때문에 일부 역사학자들은 산업혁명 대신 산업화 라는 용어가 더 적당하다 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이는 혁명이라는 단어에 배포된 단기적인 면이 아니라 보다 장기적인 면을 강조하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이런 기술 발전 들이 과연 당시의 살고 있었던 영국인들의 삶을 실제로 어떻게 변화시켜 쓸까요 산업화는 전반적인 영국인들의 생활 수준을 향상했습니다 이는 무엇보다도 증기력의 발전으로 인해 식량이 보다 빠르게 운송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산업화로 인해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가 드러나면서 이전에 비해 농업에 종사하는 인구의 비중이 줄어들었지만 식량 사정은 나아지는 역설적인 현상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런 생활수준의 향상은 가장 먼저 인구 증가로 나타나는데요 오늘날의 우리는 시간이 지나면 인구가 자연스럽게 증가한다고 당연하게 생각하지만 사실 전근대 사회에서 인구는 꾸준히 증가한다기보다는 정체되어 있었고 이따금 전쟁이나 천재지변이 일어나면 줄어들기도 했어 그런데 1700년부터 1740 년까지 600만 m5 눌렀던 영국 인구는 산업화의 시작과 함께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해서 1800년에 는 830만 1850년에 는 1,680만 그리고 1900년에는 3,000만을 돌파합니다 그러니까 산업화와 함께 영국의 인구는 50년마다 2배 가까이 증가하는 모습을 보여준 것입니다
산업혁명의 비극
그러나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 이라는 말이 있듯이 산업화 역시 전체적인 인구증가 만으로는 온전히 설명할 수 없는 현상들을 수반했습니다 여기에는 무엇보다도 공장의 등장이 큰 역할을 했는데요 산업화 이전에는 가내 수공업식으로 대부분의 상품이 생산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농촌의 각 마을에서 자신들의 집에서 만들 수 있는 물건을 알아서 만들어서 시장의 팔거나 간혹 상인들로부터 의뢰를 받아서 만든 다음에 상인들에게 넘기는 방식이었습니다 농촌의 각 가정마다 알아서 물건을 만들다 보니 복잡한 물건을 만들 수가 없었습니다
이 당시 가장 대표적인 생산품은 면류였는데 가정 별로 자신들이 소유하고 있는 배틀 한두개를 놓고 남는 시간에 면을 생산해 냈습니다
그런데 가정 별로 농사를 짓고 남는 시간에 물건을 만들다 보니 생산량이 많지 않았으면 쉽게 짐작할 수 있겠죠
그러나 산업화 함께 공장이 들어서면서 이러한 생산 방식은 완전히 바뀌게 됩니다 공장제시스템은 여러 가지 면에서 상품의 생산 방식을 변화시켰는데 가장 먼저 분업의 발전을 불렀습니다 이전에는 하나의 상품을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가정에서 만들어 냈다면 이제 공장의 출근하는 노동자는 생산 과정에서 하나의 과정 만을 반복해서 수행하게 되었습니다 때문에 하나의 상품을 자신이 온전히 만드는 이전에 산 단계에서 생산자는 전문가가 될 수 있었지만 공장이 들어서면서부터는 더 이상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 노동자는 이제 더 이상 숙련된 기술자가 아니라 전체 상품 생산 과정 중에서 하나의 과정만을 반복하게 되었고 이는 특정 노동자가 언제든지 다른 노동자의 의해서 대체될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노동자는 이제 생산과정 중 하나에 부품에서 가까워 진 것입니다
특히 이전과는 다르게 노동자가 더 이상 생산 시설을 소유 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이전에는 작은 규모지만 자신이 집에서 소유한 생산 시설로 물건을 만들어 냈지만 이제는 자본가들이 투자한 생산 시설에서 노동력 만을 제공하는 형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공장의 노동자 는 이전처럼 기술자로 대접받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대체 가능한 생산 과정에서의 부품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공장 주 더 정확하게는 자본가들은 도동 자들의 노동 환경에 대해서 신경 쓸 필요가 없었는데요 자신의 공장에서 일하는 어떤 노동자가 과도한 노동으로 인해 병이 나거나 노동을 하는 와중에 다쳤다고 해도 언제든지 그를 다른 노동자로 대체 버리면 그만 이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자본가들은 최소한의 임금 만을 주고 노동자들을 고용하여 이들로부터 최대한 많은 노동 양을 쥐어 짜내고 자 했습니다 많은 노동자들이 생계를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식량만을 살 있을 정도의 임금을 받았고 일부 자본가들은 이마저도 아까워서 현금이 아니라 공장의 생산품을 임금으로 주기도 했습니다 때문에 많은 노동자들이 공장에서 일하면서 돈을 아끼기 위해 집을 나눠 쓰기도 했는데 하나의 침대를 놓고 부부 노동자가 세를 놓아 다른 노동자와 함께 사용하는 경우도 흔했습니다. 그러니까 침대에 반을 세를 놓았던 것입니다 산업화 초기 일부 노동자들이
러다이트 운동 즉 기계 파괴 운동을 벌인 것은 바로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 대한 반발이었습니다. - 그런데 이렇게 열악한 대우를 받고 있던 노동자들 중에서도 특히나 더 열악한 집단이 있었는데요 이는 아동노동 자들이었습니다 산업화 초기 아직 아동 노동에 대한 법적인 규제가 없었을 때 많은 자본가들이 더 적은 임금을 줘도 된다는 이유로 아이들을 고용했는데요 아동들은 성인 남성의 10에서 20% 임금을 받으며 15시간 많게는 18시간 가까이 일을 하기도 했습니다 네 살밖에 안된 아이들이 공장이나 광산에서 일을 하는 경우도 쉽게 볼 수 있었습니다 열악한 환경에 처한 노동자 가구들이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자식들을 공장으로 보냈기 때문에 아동 노동 은 더욱 악순환에 빠졌습니다 당시 아동 노동이 어떠했는지를 짐작해 보기 위해서는 1833년과 1844년 통과된 공장 법이 큰 도움이 되는데요 최초로 아동 노동을 규제하는 이 법 틀에서 11살에 서 18살 사이에도 노동자는 하루에 최대 12시간 9 살에서 열한 살 사이에 노동이라는 최대 8시간 에도 노동을 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법으로 정한 최소한의 조건이 것이라니 당시 상황이 어떠했는지 가늠해 볼 수 있겠죠 이 법이 통과될 때 많은 자본가들은 여러 가지 이유를 대며 이 법의 반대했는데요
산업 경쟁력이 떨어진다 등 가 아동노동 양이 줄어들면 결과적으로 노동자의 임금이 줄어들게 되기 때문에 역으로 노동자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던가 등의 논리가 있었습니다 이처럼 어려운 상황에서 노동자들이 자신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선택한 방법이 바로 조직을 갖추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노동자 개개인은 언제든지 잠재적인 노동자에 의해 대체될 수 있었기 때문에 자본가에게 맞설 수 없지만 한 공장의 노동자 전체 혹은 더 크게 1 산업 분야에 노동자 전체가 조직된 모습을 갖추게 되면 자본가들이 쉽게 노동자를 무시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기반한 것이었습니다 - 이렇게 탄생한 노조는 자본가로부터 노동 환경의 개선을 요구할 수 있었고 자본가가 이를 수용하지 않을 시 파업을 통해서 자본가에게 타격을 줄 수도 있었죠 그러나 오늘날 헌법으로 보장된 노조 결성에 권리와는 달리 당시까지만 해도 노조는 사회적으로 극심한 논란의 대상이 얻고 많은 파업은 국가의 무력에 의해 무자비하게 진압되었습니다. 그러나 어쩌면 이 시기 노조의 등장보다 이후 역사에서 더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은 노동자 계급의식의 형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점점 더 많은 노동자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 개인만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노동자 계급 이 않은 한 집단에 속한다는 의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점점 더 많은 노동자들이 어쩌면 자신이 어느 민족에 속하는
지보다 어느 계급에 속하는지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자신이 프랑스 노동자라면 같은 프랑스인 자본가보다 민족은 다르더라도 같은 계급에 속하는 독일 노동자와 더 비슷한 이해관계와 동질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죠 칼 마르크스가 이후 유럽뿐만 아니라 세계를 관통할 작은 책자 인 공산당 선언에서 포레 타이어 알렌 더 아이도 씹 그러니까 망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라고 말할 때 굳이 만국을 언급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쩌면 이 문장 못지않게 이후 역사에서 중요하게 작용한 것은 그 바로 안 물량 일지도 모르겠는데요 노동자가 혁명에서 얻는 것은 사실뿐이요 얻을 것은 전 세계 달하는 문장입니다 - 노동자 계급 이 역사 발전의 담지 잘하는 이런 의식은 이후 19세기 유럽 역사를 관통하는 하나의 축이 됩니다
영국의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 이 산업혁명과 프랑스혁명을 가리키며 19세기 유럽 역사의 시작을 알렸던 이중 혁명이라고 표현한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이제 유럽은 더 이상 왕 귀족 성직자 그리고 농민이라는 틀을 가지고 는 설명할 수 없는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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